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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전 | 흐릿한 장막에서 꾸는 꿈
    (2025,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강다원(독립기획자) 서문

   


흐릿한 장막에서 꾸는 꿈
A Dream on a Blurred Veil 2025년 9월 3일(수) ~ 9월 14일(일)
3.SEP.2025 - 14.SEP.2025

· 기획 및 서문 : 강다원
· 작가 : 김용선, 이선안, 정주하
· 포스터 디자인 : 박소호
· 주관 및 주최 : 예술공간 의식주


영혼을 부르는 기계라 불렸던 수수께끼 같은 사물이 있었다. 17세기의 환등기(Laterna Magica)공연에서는 검은 장막이 덮인 극장 위에 해골 형태가 떠오르고 관객에게 다가가자 섬뜩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환등기 시연이 발전하면서 유령의 이미지가 연기 위에 투사되기도 했는데,¹ 사람들은 이 마법 같은 기계를 매직 랜턴(Magic Lantern)이라 불렀다. 이 기계는 현실에서 목격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소환하는 듯했다. 인간의 시각이 닿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조우시키는 영매처럼 말이다. 환등기 연극에서는 빛과 연기라는 산란(scattering)하는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을 조합해 환상을 극적으로 전달했다. 연기는 스크린² 이었고, 빛을 투사시켜 관객을 향해 이미지를 띄우는 매체였다. 그렇다면 회화는 어떠한가. 회화는 시네마와 달리 화가의 손에서 천천히 그려져 캔버스 위에 들러붙은 물감으로 환영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것은 우리 일상에서 소멸하는 순간과 사념을 기록한다. 빛이 차단되면 프로젝터의 이미지는 그 옛날의 유령처럼 ‘꺼지지만’ 회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전시의 제목 ⟪흐릿한 장막에서 꾸는 꿈⟫에서 ‘장막’은 스크린으로, 회화에서 캔버스나 광목과 같은 지지체(support)를 은유하고 있다. ‘꿈’은 환영의 이미지에 빗댄, 현실에서 파생된 것이자 일순간 사라지는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동시에, 이 제목은 어떠한 환각이나 허구의 상을 창출했던 실존한 기계를 의미하고, 산란의 물질을 거쳐 현실의 기억에 유기되었거나 회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세계를 암시한다. 빛의 흐름, 산란과 굴절, 그것이 만드는 상(像)은 이곳에 한데 모인다. 전시의 참여 작가 김용선, 이선안, 정주하는 그들의 망막에 맺힌 상을 탐구하며 그 궤적을 평면에 남겨 왔다. 이들은 실제 본 장면에서부터 현실에서 파생하는 상(想)의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 가며 천이라는 물질에 그것을 붙든다. 그렇게 그려진 회화는 빛의 파동과 이루어질 수 없는 풍경이라는 연약함을 만지고 볼 수 있는 사물이 된다.

  김용선은 바람과 빛처럼 잡을 수 없는 물질이 그리는 일시적인 형체를 표현 해왔다. 연속적으로 형태를 바꾸는 그림자를 특정 시점에서 포착해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렁이는 현상을 중첩된 드로잉으로 표현하거나 만질 수 없는 상의 기운을 ‘더듬으며’ 생동적인 식물의 잎을 그리는 등, 지속적인 물질의 운동을 담지해왔다. 이번 전시의 작품 제목에서는 심상 혹은 특정 물질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너울’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어두운 물 표면 위 맺힌, 수많은 찰나의 빛을 캔버스 위에 옮긴다. 붓에 묻은 물감을 천 위로 이행시키는 과정에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은 추상적인 형체로 남게 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일정한 움직임을 띠고 있지만 불규칙한 파동과 리듬으로 만들어진 기운처럼 다가온다.

  이선안의 회화에서는 빛이 대기를 만나 흐려지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광목천 표면에 남은 젯소의 흔적은 뿌옇게 보이는 풍경을 실재가 아닌 회화적 표현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김 서린 안경이나 안개 속을 통과한 장면을 포착한대로 그린다. 그렇게 그려진 회화에서는 발광하는 빛의 자욱으로 인해 꿈처럼 흐릿한 인상이 남는다. 한편, 사이드미러에 맺힌 차량 바깥의 풍경이나, 가까운 이가 등장하는 결혼식 영상의 일부를 그린 회화는 ‘가까이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눈이 감지할 수 없는 각도, 혹은 관찰자와 사물 사이의 실제 거리감이라는 시각 기능과 함께 사람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다. 작가는 되려 친밀한 관계 내에 놓인 인물들을 영상, 즉 한 겹의 레이어를 통해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이를 통해 결혼식과 같은 의례적인 사랑의 언약 뒤편에 도사린 미래의 불안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정주하는 멈추어 있어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바위가 춤을 추는 환상을 그린다. 우리의 주변 곳곳에 있는 돌은 무언가를 받치는 용도로 사용되는 등, 일상에서 흔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정주하는 돌을 그가 구축한 세계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림은 대체로 모노톤의 단조로운 색채로 그려졌지만, 그 안에 펼쳐진 시공은 가벼운 돌들이 화면을 자유로이 부유할 수 있는 우주처럼 보인다. 우리가 군림할 수 없는 또 다른 곳에서 익숙한 생명체들이 그들만의 안전한 생태계를 일구듯. 한편, 여기에서 돌은 ‘응어리’로 비유되는 낯익은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력을 거스르고 켜켜이 쌓인 돌을 해결될 수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치환한다면, 작가가 일군 흑백의 세계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으면서도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세계로 바라볼 수 있다. 

  견고하지 않아서 그릴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있다. 물감은 찰나라는 운명이나 사소한 꿈을 시연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찍힌다. 이는 기억이나 상상에 머무른 형상을 가시화하려는 시도이기에, 곧 사라질 유령처럼 허망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곳의 회화는 망령같은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면서도 그것을 캔버스 천에 붙들어 둔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빛과 연기의 장막이 남긴 환영과 달리, 회화는 지워지지 않는 표면 위에 머문다. 그것은 한때의 순간을 증명하고 또 미래를 암시하는 징후
이다.




¹ 올리버 그라우, 『미디어아트의 역사』, 주경란 옮김, 칼라박스, 2019, p.136
² 환등기 공연에서 연기를 스크린으로 바라 본 연구로, 고혜빈, ⌜포스트-매체' 시대의 매체로서 스크린⌟, 국내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023, p.34-35를 참고하였다. 초기 환등기 공연에서는 공연장 내부의 벽이나 희뿌연 연기를 향해 이미지를 영사하여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또한 18세기 대중적 환등기 공연인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서는 천장에 반투명 천을 걸었고, 이미지 배경과 동시에 환등기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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