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안 개인전 ⟪창백한 안개를 걷어내는 방법⟫
(2025, 큐아카이브, 서울) 리뷰
⌜참된 보기를 고르시오⌟
강다원(예술공간 의식주 큐레이터, 독립기획자)
이선안의 회화는 멎은 순간을 다룬다. 하지만 애초에 회화는 정지된 시간 위에 있어 왔다. 회화는 흔적으로 남는, 움직
이는 순간을 기록한 평면이다. 캔버스 천과 지지대는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물감 묻은 붓의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물론 캔버스, 지지대, 물감 등은 재현된 이미지 외부의 재료에 해당하지만, 이미지 자체도
마찬가지다. 사진 매체도 다르지 않듯이. 그러니 정지된 장면이 회화로 재현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거나 특별하지
않다.
이선안은 그와 가까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회화의 대상으로 가져온다. 그의 회화에서는 특별함, 생경함이
나 놀라움과는 다른 차분한 감각이 도출되는데, 작가가 묘사하는 풍경들이 누구에게나 가닿을 수 있는 시공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평화로운 일상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어색함을 발굴하지 않는다. 기법의 측면에서도 캔버스와
광목천에 유화 물감이 얹혀 그려진 결과는 ‘뿌옇게’ 보이고 어딘가 ‘축축한’ 촉각적 감각을 선사하지만, 흐리게 표현된
외곽선은 새벽녘이나 짙은 안개 속에서 보이는 풍경의 일부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작가가 바라보았을)
어떤 장면이 사진으로 포착되고 그것이 다시 회화로 표현되는 과정에서는 과감한 가공과 편집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이해 가능한 장면들로부터 미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그 거리와 함께, 그가 그린 차가운 세계는
작가의 태도로부터 기인했노라 생각한다. 작가의 무던한 재현은 시간이 정지한 회화를 어떻게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하는지, 그리고 그 멎은 상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목격하는 관조의 태도를 질문하게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 이선안의 개인전 ⟪창백한 안개를 걷어내는 방법⟫을 조금 더 들여다보기 위해 두 축을 세웠다. 하나는 ‘관찰자’로서 작가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보기’에 관한 것이다. 둘은 본다는 행위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관찰자인 작가를 주어로, 보기라는 행위를 서술어로 연결하면 매끄러운 하나의 문장이 된다. 하지만 둘을 따로
두었을 때, ‘보는 것’이라는 보편적 행동은 작가라는 하나의 관찰자를 거쳐, 유일한 회화로 귀결된다.
가까우면서도 먼, 멀면서도 가까운
전시장 초입에 <1초의 카이로스>(2025)가 있다. 이 그림은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등장하는 영상의 일부를 두 개의 캔버스에 나눠 그린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했던 이들은 분리된 화면으로 인해 다른 순간에 존재하는 듯 보인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한 쪽은 눈을 감고 있고, 다른 이는 눈을 뜨고 있으며, 그 둘의 시선은 맞지 않다.
이들이 담겼을 영상의 타임라인을 상상해 보자. 좌측 남성의 화면에서는 더 구체적인 상황의 정보가 나와 있다. 잠시
입을 맞췄다가 떼는 몇 초(아마도 1초였을)의 연속된 움직임은 분리된 캔버스를 거쳐 효율적으로 현현된다. 지금은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는 전제로 이 그림을 다시 보면, 아무리 작품을 나란히 건다고 하더라도 결코 붙을 수 없는 연작으로 남아 있고, 찰나라는 시차는 두 사람의 마주할 수 없는 광대한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영상을 아무리 루프(Loop) 하며 다시 보아도 그것은 이전에 머물러 있는 기록물일 뿐, 현재의 회화에 수반된 과거일 테다.
<낯선 가족>(2024)은 움직이는 타임라인의 찰나를 담았다는 점에서 <1초의 카이로스>와 흡사하다. 사람 사
이의 결속된 관계를 암시하는 결혼식 장면이라는 점에서 앞의 작업과 공명한다. 이선안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그림이 새언니의 결혼식에서 출발했음을 알려 주면서 사람의 관계라는 명칭, 그 속의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전시 초입의 <1초의 카이로스>로 인해 사람 대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발생하는 관계를 더욱 ‘알 수 없다’라고 말할 수밖
에 없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한 관계의 깊이를 나누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혼이 다른 무엇보다
더 무거운 결속인 것은, 그것이 사회적 합의, 의례를 의미하는 서류로 엮이며, 가족을 교환하는 단단한 약속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신부는 아버지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결혼식의 다채로운 풍경은 푸른색의 필터를 끼운 듯
가려지고, 되려 불안한 기운이 떠오른다. 새로운 가족이 되려는 신부의 걸음 뒤에는 낯섦이 있다. 그런 낯섦은 ‘낯선 가족’으로 관계 맺는 신부의 얼굴을 스친다. 모두가 조금씩은 들뜬 축하의 자리에서 그를 관조하는 작가에 의해 미세한
긴장이 발견된 듯하다.
이 두 그림은 움직이는 이미지에 등장하는 사람의 순간적인 동세를 그린 회화다. 이들과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작가는 멀찍이 그들을 담는다. 동시에 가까운 관계이기에 가능한 그림을 그린다. 특히 낯선 가족으로의 진입을 함께 공유하는 일원으로, 그러나 축복이라는 요구된 감정을 접어 둔 채 한 발 떨어진 상태에서 푸르게 빛의 장소를 채색한다. 그리고 정지된 관찰자로서 작가는, 회화 안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사이 혹은 그들과 본인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보류한다.
사실이 될 수 없는 사실
‘보기’라는 익숙한 행동은 목적과 과정에 따라서 보는 행위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예컨대, 관찰은 보기의 하위 개념 격
이지만, 관찰에는 보는 것보다 더 긴 시간과 노동이 요구된다. 또한 관찰자와 사물 사이의 각도, 보는 것을 보조하는 도구의 존재, 무언가를 보는 순간의 환경에 따라서 대상의 상(像)은 달리 보인다. 바라볼 수 있지만, 정확히 볼 수 없는 것1
에 대해 작가가 이야기했을 때, 나는 이때의 ‘것’이 사물을 지칭하는 대명사인지 아니면 불특정한 순간인지 더 이해하고 싶었다. 객관적인 사물의 외연이 무엇인지를, 관계를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에 대한 가늠을 다잡기 어려워졌다. 작가가 그린 차량 안팎의 거울은 비교적 구체적인 풍경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흐릿한 외곽선으로 뿌옇게
그려졌다. 회화적인 표현을 거쳐 흐리고 장면으로 재해석되었다. 동시에 그런 장면을 보고서 실제로 언젠가 맨눈으로
본 듯한, 비교적 사실적인 기억이 재생되었다.
연작으로 그려진 <멀리 바라보기>(2025)에는 어두운 밤 도로의 헤드라이트가 전면에서 발광하고 있다. 빛
의 잔상은 야간 도로 위 차량의 형상을 흐린다. 표면에는 광목천 위에 거칠게 남은 불규칙한 젯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화와의 반응으로 떠오른 얼룩은 순간 포착된 빛의 움직임을 재현한다. 이 그림은 전시장의 다른 회화에 비해 구체적
인 풍경이 생략된 채 남아 있다. 차량 거울에 비친 매끈한 표면은, 이 작업 속 김 서린 안경으로 인해 흩어진 장면과 연
결된다.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라고 굳게 믿게 되는 과정은 거울(사이드미러) 표면에서부터 형상을 가리는 안경을 통
과하며 천천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눈과 사물 사이의 추상적인 공백은 이동하는 차량과 함께 함께 움직인다. 망막을 침
투하는 강한 빛 이후 감은 눈으로 떠오르는 불규칙한 형체들은 정적인 사물과 관찰자 사이 공백을 부유한다.
전시의 중간쯤에 위치한 <흐린 눈으로>(2025)와 <지우고 덮어 만든 곳>(2025)은 가벽에 나란히 걸리고,
그 오른 뒤편에는 <스치는 말>(2025)이 전시된다. 이 세 작품은 ‘안개’라는 전시의 제목을 뚜렷하게 담고 있다. 세 작
품은 눈과 비가 날리는 흐린 날씨를 그렸다는 점에서, 제목에 등장한 기후 현상인 안개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어렴
풋이 보이는 풍경은 축축한 대기로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졌다. 그러나 <스치는 말>의 바로 왼편 <가장자리로 그려내기>(2025)는 견고한 어느 건물의 입구를 그렸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작가는 2018년부터 대략 2023년까지 이러한
소재와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뭉그러지고 지워진 회화가 나열된 이 전시에서 <가장자리로 그려내기>는 유독 더 딱딱하게 느껴진다. 타인과 신체적·정신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을지라도,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세한 불일치를 그려 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틈 속에서, 직접적 충돌 없는 미묘한 기류는 지난 작품에서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가장자리로 그려내기>는 아파트 단지의 불 켜진 가구를 멀찍이 조망했던 과거의 작업과 지금을 이어주는 역할
을 한다.2 이 회화는 익숙한 아파트의 일부이지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위화감을 주면서 회화 속의 장소를 끝
없이 고립으로 침잠시킨다.
<가장자리로 그려내기>처럼, 다른 작업과 구분되는 표현이 도로의 반사경을 그린 <지워낸 막>(2025)에서
도 유지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림을 그리고 지워내는 작가의 표현은 다른 그림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마치 실제 도로의 반사경처럼 전시 공간 벽면 모서리에 설치되었다. 정갈하게 걸린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관객은 거울이 있으면 안 되는 곳에 놓여 자기 모습을 갑작스레 맞이한 순간처럼 이 그림을 맞닥뜨린다. 회화
는 실제 거울의 크기와 거의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크다. 비교적 먼발치서 도로의 풍경을 그린 잔잔한 작품을 감상하다가, 캔버스에 꽉 들어찬 거울을 발견하면서 낯섦이 고조된다. 정방형의 캔버스를 답답하게 차지한 원형의 반사
경에는 지워진 풍경이 있다. 언젠가, 눈동자를 돌려 흘끗 본 차 안의 사이드미러나 백미러 위 흐릿한 풍경은 어색하지
않았다. 그림에 나타난 저녁 시간대에는 바깥이 충분히 뿌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도로에 우뚝 선 반사경처럼 관객을 기다리는 <지워낸 막>에서는 약간의 비현실적 감각이 도출된다. 이 그림은 관객이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오면서
감상한 작품처럼 무언가를 보았지만 들여다보거나, 선명히 기억할 수 없는 어떤 모호한 순간에 상상을 덧대 그려낸 듯
보인다.
크쥐시토프 키에로브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에서는 망원경을 통해 매일 건너편 아파트의 여자(마그나)
를 관음하는 청년(토메크)이 등장한다. 전시 이후, 거울과 그에 비친 상이 거듭 등장하는 이선안의 회화를 볼수록 망원경에 비친 오래된 영화의 어느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토메크의 일과는 망원경 렌즈를 거쳐, 창문 프레임 안의 마그나를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필름 안에서 또 다른 필름이 만들어지듯, 이중적인 구조는 토메크로 하여금
마그나에 대한 환상과 그녀를 실제로 대면하고 싶은 욕망을 일깨우게 한다.
그러나 이선안은 대상을 투영하고 반사하는 매체를 거쳐 상을 보지만, 결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고
관음적 욕망으로부터 타인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훔쳐보지 않는다. 작가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와 각도에서 맺힌
사물과 관계를 관찰한다. 그리고 샅샅이 탐색하지 아니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들을 살핀다. 인물과 풍경은 여전히 멀리, 작가와는 별개로 흘러간다. 그렇게 정지된 회화의 장면은 고정된 시각의 응시에서 비롯된 부분을 찍어낸 것처럼 차분히 사건을 끌어 올린다. 그 때문에 관객은 어떠한 불편한 감상-불쾌한 시선-없이 담담하게 회화 사이를 걷는다.
처음에 이선안은 그의 눈이 엮어 내는 관계로부터 자신을 밖으로 빼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말미에는
작가의 회화가 그렇게 남겨진 공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작가 본인과 대상, 사건, 관계 사이에서 빠져나와, 관조하고,
그를 재현하기 위한 태도를 담고 있음을 느꼈다. 이는 시각적인 오해, 사물과 사람을 곡해해서 보는 행위와는 달랐다.
분주하게 흘러가는 장면이 희미하게 재현되고, 관계로부터 분리되면서 보이는 현상이 실제로 그러한 지는 중요치 않은 듯했다. 오히려 실제로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거나, 구체적인 수치로 표기되는 간격을 두고 있다는 그 사실이 상상의
단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냉정한 관조의 태도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없다는 회화의 출발은, 화면 위에서 지우고 덮이는 과정을 거치며 도리어 현실에 가까운 그림이 되고, 이해할 수 있는
전제로 받아들여진다.
¹
이선안 작가 노트 참조(2025. 07. 18)
²
작가는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지속적으로 아파트 단지의 장면을 그려왔다. 건너편 건물 창문을 통해 보이는 다른 이의 생활,
번진 가로등의 불빛 등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다세대 아파트 단지를 통해, 일정한 거리를 지키는 ‘보기’를 화면 위에 옮겨 왔다.
(2025. 08. 15 이선안 포트폴리오 참조)